첫 퇴사로부터도 3개월이 넘었고, 이제 슬슬 혼자만의 굴에서 나와 사회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간 개인적으로 정리해야 할 일들도 대부분 잘 마무리 지었고, 쉴 만큼 푹 쉬었다.
이제 새로운 것들을 해나가야 할 차례이다.
하지만 그 전에 지금의 생각을 정리해 남겨두려 한다.
어딘가에 속해 바쁘게 살아가다가 이 때의 나는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지냈는지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이다.
# 나의 첫 직장
다사다난했던 대학/대학원 생활을 마친 나는 분당 소재의 IT 기업인 첫 직장에 전문연구요원으로 입사하였다.
2019년 하반기에 입사했으니, 이직을 준비하는 지금 시점에선 벌써 4년이나 되었다.
처음 업무는 C++로 데스크탑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었지만, 중간에 회사 제품이 웹 앱 컨셉으로 완전히 전환되어 그 때부터 웹 개발을 하게 되었다.
회사 생활 중 야근도 많고 몸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고 그 완성도를 높여간다는 점이 나의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 같다.
사실 밖에서 보면, 퇴사 직전까지의 생활이 왜 불만족인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회사 내에서도 나름 좋게 평가를 받고 있었고,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이 한 팀에 있었으며 그들도 나를 신뢰해주었다.
연봉도 중간에 생긴 인센티브 제도 덕분에 입사 시에 비해 50% 이상 상승해 있었고 회사 정책으로 연구원들에게는 1인 1실이 제공되어 업무 환경도 훌륭했다.
더군다나 개발하던 제품에 대해서도 나름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기에 후반기에는 업무 능률도 크게 향상되어 워라밸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미련없이 지난 6월을 기점으로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 이직 동기
주위를 둘러보면 이직 동기가 '사람'이거나 '연봉'인 경우가 많은 것 같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둘 다 해당이 안된다.
내 경우에는 일에 대한 흥미가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개발 자체가 재미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미 다른 업종으로 떠나갔었을 것이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개발하는 제품에 대한 흥미가 완벽히 사라졌다.
지난 해부터 그 원인을 찾기 위해 고민했고, 지금까지 두 가지의 이유를 찾아내었다.
1. 내가 개발한 제품에 대한 불만족
내가 개발하던 제품은 1인 사용자를 위한 데스크탑 문서 편집기와 다중 사용자의 협업을 위한 문서 편집 웹 앱이었다.
쉽게 MS Word와 Google docs 같은 제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문서 편집기 분야에서는 이미 너무나도 커다란 산이 있다.
바로 두 줄 위에서 언급한 MS Office 제품군이다.
대다수의 기업이 그런건지 아니면 내가 다니던 곳만 그랬던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커다란 퍼스트 무버에 대응하기 위해 내세운 전략은 '거기서 되는거 우리도 다 된다'와 '근데 우리가 더 싸다'였다.
물론 일개 사원이 아주 좁은 시야로 이해한 것이므로 실제 기업이나 경영진의 모토와는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고 다른 직원들과의 협업시에 그렇게 느껴졌다.
특히나 개발과 디자인 직군 쪽에서 이런 느낌이 강했다.
개발 파트에서의 신 기능 개발이란 경쟁 제품의 기능 중 우리가 아직 지원하지 않는 기능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었고, UI 디자인은 경쟁 제품과 거의 동일하게, 마치 같은 제품의 다른 테마인 것처럼 기획되었다.
UX/UI 디자이너에게 새로 개발중인 기능의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문의를 하면, 경쟁 제품 중 하나와 똑같이 동작하는게 목표이니 가이드 문서 나오기 전까지 그거 보고 하시면 된다는 답변을 가장 많이 들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이상하게 동작하는 경쟁 제품이 왜 그런 오류를 일으키는지 원리를 파악하고 그 이상함마저 카피해버리는 경우도 본 적이 있다.
그래도 중간에 웹 앱으로 전환하면서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긴 했었지만 이전에 비해 그 정도가 좀 덜해졌을 뿐 기본 골조가 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클론 코딩을 하는 기분이었다.
2. 나에 대한 불만족
앞에 열심히 써놓긴 했지만, 결국 저건 외부 요인일 뿐이다.
결국 나를 이끌어가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고, 이끄는 방법은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성찰을 하자면 나는 너무 행동이 늦었다.
처음의 조그만 불만은 높은 연봉 상승률과 좋은 워라밸이란 당근이 잠재웠고, 이는 전문연구요원 기간 3년을 다 채운 후에도 나를 망설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내면의 불만이 외부의 당근보다 커져갈 때 쯤이면 어김없이 바쁜 회사 일이 나타나 불만에서 눈을 돌리게 하였다.
그러던 중 한 차례 패키징이 끝나고 조금 여유로워져 있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입사 초기에 비해서는 성장한 건 맞긴 한데... 과연 일 년 전보다는 내가 성장을 했을까?'
'그리고 앞으로 일년 후에는 내가 성장해 있을까?'
'만약 성장이 더뎌진게 맞다면, 내가 은퇴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위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No!' 였다.
회사에서의 나는 이미 모든 것에 너무 익숙해져버려 일을 할 때에도 최적의 익숙한 방법을 빠르게 찾아내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회사는 그런 효율성을 높게 평가하였다.
이 회사에 계속 있는 한 나 스스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이를 통해 발전하고 성장해나갈 수 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고여버린 나에 대해서 만족하고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행동하기로 결심했고 나름대로의 plan A, B를 만들어 실천하기로 마음 먹었다.
# 변화를 위한 Plan A
의외로 Plan A는 이직이 아닌 유학이었다.
내가 성장하고 롱런하기 위해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나름의 답은 비전공자로서 베이스가 탄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탄탄히, 그리고 온전히 힘을 쏟아 쌓아보자라는 생각으로 유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코로나 당시만 해도 나름 비벼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학교들은 코로나의 종결과 함께 쏟아져나온 layoff와 유학생들로 인해 입학 컷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했고, 나는 'I regret to inform you...'로 시작하는 메일을 무수히도 받게 되었다.
# Plan B, 이직이다. (근데 퇴사는 왜...?)
실제로 마지막 decline 메일을 받은 건 6월이지만, 사실 3월까지 합격 메일이 오지 않았다는 건 거의 불합격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사실은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대학의 확언을 듣기 전까지는 '그래도 혹시...?'라는 마음으로 일말의 기대를 품었고 하루에 메일함만 10번씩은 열어봤던 것 같다.
그래도 4월에는 단념하고 Plan B인 이직을 위해 움직이기로 생각은 했으나, 싱숭생숭한 마음과 기약없는 기다림에 파괴된 멘탈로는 도저히 퇴근 후에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당장 퇴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퇴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야 작년부터 있었지만, 그래도 그건 유학에 성공하거나 이직할 곳이 정해진 후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준비를 해야할 때가 되니, 열심히 당근과 채찍을 휘두르는 회사에 내상까지 입은 나로선 계속 무너져가기만 할 뿐이었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조치는 퇴사라고 생각했다.
# 퇴사 후 지금까지
제 1의 목표는 이직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나를 되돌리는 것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상태로는 이직에 성공할 확률도 적을 뿐더러, 이직하더라도 한동안은 새로운 동료들에게 누만 끼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것이 헬스장을 등록한 것이다.
육체의 고통 속에 축 쳐지는 기분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었고 효과는 확실했다.
그리고선 그저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했다.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공부했고, 만들고 싶은 것이 생기면 만들었다.
그리고 그저 쉬고 싶을 때는 마음껏 산책하면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괜찮아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어쩌면 내게는 garbage collection을 실행할 idle time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게 뭔 공대 개근가 싶어 그만두기로 하였다.
# 앞으로
이제는 다시 달릴 때이다.
근데 상황이 좋진 못한 것 같다.
엔데믹의 여파로 채용 시장이 얼어붙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더군다나, 내 경력은 일반적인 프론트엔드와는 결이 좀 달라서 좋은 곳으로 이직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기는 한다.
그래도 어쩌겠어 가야지.
지금 내게 필요한건 당장의 높은 연봉이나 워라밸이 아닌 성장이니 그게 가능한 곳이면 찬 물 더운 물 가리지 말고 뛰어들어보자.
물론 새로운 직장을 찾는데 꽤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첫 퇴사 후 지금까지의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란 건 증명해보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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